가수소개

[스크랩]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Dove-ok 2015. 3. 8. 13:52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 Proud Mary

 

 

 

지금 30,40대인 사람이라면 대부분 경험했겠지만

팝송이 마구 유입되던 1970년대 초반 서울에는 CCR 노래 열풍이 일었다.

야유회, 고고장 등지에서 젊은이들은 '로다이', '헤이 투나잇', '모리나' 등

흥겨운 CCR의 레퍼터리들에 율동을 맡겨버렸으며,

그열기는 1970년대 말까지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심지어 CCR의 최대 히트 송 'Proud Mary' 같은 곡은

외설적인 우리말로 가사가 바뀌어 (요즘 말로 노래 가사 바꿔부르기, 즉 노가바인 셈이다) 유행되기도 했다.

 

비단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CCR은 당시 일세를 풍미하고 있던 고고 음악의 대명사였다.

 

CCR의 경쾌한 곡들은 상당수 정치 사회적 메시지로 가득차 있다.

영어라는 '장애물'을 갖고 있지 않은 본토 미국인들은

CCR 노래의 이런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고

또한 그들 노래가 빅 히트한 터라 지금도 그들이 의도했던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John Fogerty - Who'll stop the rain (2008년)

 

 

 

'Who`ll Stop the Rain'

여기서 '비'라는 어휘는 세상의 혼란과 정책의 사기를 상징하고 있다.

이 노래가 발표된 1970년, 그 무렵 미국사회의 혼란은 전쟁이라는 것이었고 구체적으로 월남전이었다.

 

그룹의 리더 존 포거티(John Forgerty)는 CCR의 중추이자 전부였다.

작사, 작곡, 편곡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룹의 목소리, 정신, 그리고 손과 발이었으며 그룹의 운영까지 총괄했다.

 

캘리포니아주의 엘 세리터 교외에서 성장한 그는

친형 탐 포거티(리듬기타), 중학교 동창인 도우그 클리포트(드럼), 스투 쿡(피아노)과

1959년 '블루 벨베츠'라는 이름의 밴드를 조직해 음악활동을 개시했다.

 

무명 그룹으로 완전히 밑바닥을 맴돌았지만

그래도 성공에의 집념은 버리지 않고 존 포거티가 1967년 6월 육군에서 제대하자

6개월간 피나는 연습을 거친 뒤 공동으로 2천5백 달러의 자본을 투자, 앨범 제작에 임했다.

이들은 그룹명도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reedence Clearwater Revival)로 바꾸어 전열을 가다듬었다.

 

존 포거티의 우상은 시카고 블루스의 양대 거목인

머디 워터스와 하울링 울프였고 처크 베리, 보 디들리, 리틀 리차드, 엘비스 프레슬리, 칼 퍼킨스 등

초기 록큰롤 기수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컨츄리 색채가 강한 초기 록큰롤인 '로커빌리'에

시카고 블루스를 드라마틱 혼합, 미국 남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독특한 사운드를 창조해냈다.

 

그가 우울한 음조의 블루스에 심취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어렸을적 포거티는 부모가 싸움질만 계속하는 극히 왜곡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나마 아홉 살 때 아버지는 가출해버려 영영 돌아오질 않았다.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 Down on the corner (1969년)

 

 

 

1969년부터 스타급으로 치고 올라선 이들은

1970년 지구촌의 어느 슈퍼스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인기를 과시했다.

그 해 일 년간 무려 'Down on the Corner', 'Travelin` Band' 등

골드 싱글이 4곡이나 됐고, 앨범은 Cosmo`s Factory, Green River 등

발표한 6장 전부 골드로 기록되었다.

 

4곡의 골드 싱글 및 6장의 골드 음반은

한 아티스트가 일 년간 가장 많이 내놓은 골드 디스크로 이 기록은 팝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 Bad moon rising

 

 

'Bad Moon Rising' 'Long as I can see the Light'

<타임>지는 1969년 6월 기사에서 “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은

이런 그룹들과 달리 혁명을 논하는데 흥미가 없다.

네 명의 단정한 모발과 심플한 복장을 한 이 밴드는 사회변혁보다는

그들의 뿌리나 사람들 간의 문제에 관한 노래를 선호하고 있다”고

그들은 정치적인 데는 거의 관심이 없는 그룹으로 보도했다.

 

CCR은 1971년 탐 포거티가 탈퇴하면서 균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네 살이나 아래인 동생 존의 카리스마적인 통치와 우월성이 배태한 형제간 불화가 주원인이었다.

실력은 인정한다 치더라도 '형님 먼저'의 기본 예절을 발휘 못한 동생에게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 Walk on the water

 

 

정신이 번쩍든 존 포거티는 앨범 <마디 그라(Mardi Gras)>를 만들 때부터

그간의 독재를 청산하고 다른 멤버들도 작곡과 노래에 참여시키는 등 '민주화 조치'를 단행하지만,

이미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3인조로 유럽 순회 공연길에 오르고

'스위트 하이치하이커'같은 히트곡을 내지만 그룹은 1972년 10월 해체되고 말았다.

 

포거티는 해산 후 1인 밴드인 '블루 리지 레인저스로,

1975년부터는 본인 이름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CCR시절부터 누적되어온

팬터지 레코드사와의 해적판 및 로열티 배분 문제 등으로 불협화음을 빚게 되면서

음악 활동에 회의를 느꼈던지 1976년부터는 일체의 음악 작업을 중단한 채 오레곤주의 농장에서 은둔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85년에 거의 10년이라는 기나긴 침묵을 깨고

음반 <중견수(Center-field)>를 발표, 화려한 재기에 성공했다.

여기서 존 포거티는 싱글 '올드맨이 나타났네(The old Man down the Road)'를 크게 히트시켜 재삼 진가를 확인시켰고,

올드 팬에게는 CCR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앨범을 제작할 때까지도 팬터지 레코드사 사장에 대한 미움이 가시질 않아

수록곡 '잰즈는 춤출 수 없어(Zanz Kant Danz)'를 통해 밴스 사장을 질타해마지 않았다.

 

솔로 활동 이후 15년간 팬터지 레코드사에 대한 증오로 단 한 차례도 CCR 노래를 연주하지 않았으나

1987년 메릴랜드주 랜도버에서 거행된 파월장병들을 위한 '웰컴 홈' 공연에서 금기를 깨고 옛 노래를 불렀다.

그는 이 자리에서 “로열티 문제로 인한 레코드사와의 구원(舊怨)을 극복할 때가 되었다”고 밝히면서

청중들에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월남전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적극적으로 노력해줄 것을 제언했다.

 

투명하고 경쾌한 리듬과 현실사회에 대한 곧은 정서의 표출로

월남참전용사들을 포함한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CCR과 그 대변자 존 포거티.

현실 반영에 가슴을 닫고 있는 요즘의 팝 풍토를 보면서

우리는 더욱 그와 그의 그룹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메모 :

'가수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Pink Floyd  (0) 2015.03.10
[스크랩] Led Zeppelin  (0) 2015.03.09
[스크랩] Vaya Con Dios  (0) 2015.03.07
[스크랩] Alizee  (0) 2015.03.06
[스크랩] Doobie Brothers  (0) 2015.03.05